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드미트리 돈스코이 (문단 편집) == 생애 == 1360년대와 1370년대 초 리투아니아-트베리 연합국의 공격을 막아내고 몽골에 대한 연례 조공을 거부하였다. 이후 1378년 보쥐강 근처에 있던 몽골군과의 소규모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다. 이에 분노한 [[킵차크 칸국]]의 실력자 마마이[* 마마이 '칸'으로 불리는 경우가 많은데, 정작 그는 칸의 자리에까지 등극하진 못했다.]는 1380년 [[리투아니아 대공국]]의 [[요가일라]]와 연합해 대규모 군사를 일으켜 모스크바에 쳐들어왔다. 하지만 [[1380년]] [[9월 8일]], [[돈강]] 상류에 있는 쿨리코보에서 펼쳐진 전투에서 마마이를 관광보내면서 승승장구하게 된다. 이를 계기로 드미트리 대공은 "돈강의 드미트리"라는 뜻을 가진 드미트리 돈스코이라고 불리게 되었다. 모스크바 군 역시 전력의 반 이상을 잃는 등 큰 타격을 입긴 했지만 러시아군이 처음으로 몽골 대군을 궤멸시킨 전투로 후대에 높이 평가되었다. 이 전투에서의 승리로 러시아는 [[몽골-타타르의 멍에|몽골의 기나긴 지배]]에서 벗어나는 듯 했으나.... 마마이를 몰아내고[* 이 때 마마이는 토크타미쉬와의 세력 다툼에서 패배해 [[크림반도]]로 도망쳤으나 그 곳에서 뜻밖의 죽음을 당한다.] 킵차크 칸국의 칸이 된 [[토크타미쉬 칸]]에 의해 이 모든 상황이 뒤집힌다. 토크타미쉬는 [[티무르]]의 라이벌로 불릴만큼 걸출한 군사적 능력을 갖춘 인물이었고, 결국 라이벌이였던 다른 루스계 공국들과 연합한 토크타미쉬에 의해 [[1382년]]에는 역으로 모스크바가 털리면서 러시아의 독립은 물 건너갔다. 드미트리 돈스코이는 모스크바 대공 자리와 목숨만은 가까스로 유지했으나 그의 아들은 토크타미쉬에 의해 인질이 되었고 동시에 패전의 대가로 엄청난 배상금을 물게 되었다. 동시에 전쟁으로 황폐화된 모스크바를 지켜봐야했던 건 덤. 결국 러시아가 몽골의 지배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건 모스크바가 털리고 100년이 지난 [[이반 3세]] 시절이 되어서였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